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스차일드 가문 (문단 편집) ==== 프랑스 로스차일드(로쉴드) ==== 프랑스 지부는 원래 2개였다가 나중에 합쳐졌다. 다른 지부들처럼 금융사업을 하고 있으며 와인 사업도 하고 있다. 이들은 성을 프랑스식으로 '로쉴드'라고 읽는다. 첫 번째 프랑스 지부([[금융]])는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의 막내 아들인 자크 마이어 로스차일드가 파리에 지부를 세운것이 시초다. 나폴레옹 전쟁 동안 그는 대다수 철도 건설과 채광 산업의 자금조달 역할을 했다. 자크의 아들 귀스타브 드 로스차일드와 알퐁스 자크 드 로스차일드는 은행 사업을 계속했고, 모은 돈을 1870년대 [[보불전쟁]]에서 독일이 점령한 프랑스 땅의 반환을 요구하는데 사용하였다. 로스차일드 프랑스 지부 역시 국제적 투자 은행의 거장이 되었다. 두 번째 프랑스 지부([[와인]] 사업)은 너세니얼 드 로스차일드에 의해 창설되었다.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가문의 영국 지부의 수장인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의 4남으로 1850년에 파리로 건너왔고, 그의 삼촌인 자크 마이어 로스차일드와 함께 일했다. 1853년 너세니얼 드 로스차일드는 지롱드주에 위치한 보르도 포도주의 생산 양조장을 사들여서 포도밭을 개명했고, 이 포도밭에서 나온 포도로 만든 포도주, [[샤토 무똥|샤토 무통 로쉴드]]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고급 [[포도주]]들 중 하나가 되었다. 너세니얼의 삼촌인 자크 마이어 로스차일드는 [[샤토 무똥|샤토 라피트 로쉴드]] 양조장을 획득했고 아들인 알퐁스 자크 드 로쉴드에게 물려줬으며 비슷한 시기에 로스차일드 프랑스 지부 2개가 하나로 합쳐졌다. 로쉴드 가문은 [[프로이센-프랑스 전쟁]] 때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. 로쉴드 가문의 저택은 파리 근교에 있는 Schloss Ferrières(샤토 페리에르)였다. 전쟁 때 로쉴드 가의 대표인 알퐁스는 지방으로 피신하고 집사만이 남아서 페리에르 저택을 지켰고, 독일군이 저택을 징발해서 파리 봉쇄전 당시 [[빌헬름 1세]]와 [[오토 폰 비스마르크]]의 숙소 겸 최고사령부로 사용했다. 빌헬름 1세는 저택의 약탈 및 파괴를 금지하고 알퐁스 본인이 아닌 부인의 침실을 사용했고, 침대도 자신의 군용 침대를 가져다 썼다. 여기까지는 좋았다. 그러나 빌헬름 1세가 저택을 떠난 뒤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독일군 병사들이 창고의 와인을 훔쳐가거나 동물들을 죽이는 등의 행패를 부렸고, 심지어는 비스마르크조차 "값을 쳐줄 테니 와인 1박스를 내놓으라"고 할 정도였다.(...) [[http://www.atlasnews.co.kr/news/articleView.html?idxno=1324|출처]] 이후 알퐁스 제임스 드 로쉴드(Alphonse James de Rothschild,1827 ~ 1905)는 독일과의 배상금 협상 과정에 참여했다. 20세기에 들어서는 공인 1등급 와인인 '[[샤토 무똥]] 로쉴드'(Château Mouton Rothschild) 와인으로 유명한 필리프 로쉴드 남작(Baron Philippe de Rothschild, 1902~1988)이 프랑스 로스차일드 가문의 핵심 인물이었다. 프랑스 지부는 1982년에 [[프랑수아 미테랑]]이 이끄는 정부가 로쉴드 은행을 국유화 하면서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. 이에 프랑스 지부 수장이었던 다비드 드 로쉴드는 세 명의 직원과 100만 달러밖에 되지 않는 자본으로 완전히 새로운 로스차일드 은행을 다시 세웠고 오늘날 프랑스 로쉴드 은행은 어느정도 재기하는데 성공했다. 프랑스 대통령 [[에마뉘엘 마크롱]]이 프랑스 로쉴드 은행 출신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